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탈리아 통일 (문단 편집) ===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=== ||<-2> {{{#fff {{{+1 '''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'''}}}[br]Prima guerra d'indipendenza italiana[br]The First Italian War of Independence }}} || ||<-2> [[파일:Novara_Villa_Mon_Repos_1849_Prina1863.jpg|width=100%]][br]1849년 [[노바라 전투]] || ||<-2> [[1848년]] [[3월 23일]] ~ [[1849년]] [[8월 22일]] || ||<-2> '''{{{#fff 장소}}}''' || ||<-2> [[피에몬테]][br][[롬바르디아-베네치아 왕국]] || ||<-2> '''{{{#fff 원인}}}''' || ||<-2> 자유주의 사상의 전파[br]시칠리아의 독립 선언으로 시작된 빈 체제 항거 운동 발발[br]사르데냐-피에몬테 왕국의 [[밀라노]] 병합 시도 || ||<-2> '''{{{#fff 교전국}}}''' || ||'''이탈리아 반도군'''[br] [[파일:이탈리아 왕국 국기.svg|width=23]] [[사르데냐 왕국|사르데냐-피에몬테 왕국]][br][[파일:Italy_cockade.svg|width=23]] 이탈리아 자원군[br][[파일:Flag_of_Italy_with_inscription_«Italia_libera_Dio_lo_vuole».svg|width=23]] 밀라노 임시 정부[br][include(틀:국기, 국명=산마르코 공화국)][br][[파일:State_Flag_of_the_Grand_Duchy_of_Tuscany_(1848-1849).svg|width=23]] [[토스카나 대공국]][br][[파일:Flag_of_Sicilian_Kingdom_1848.svg|width=23]] [[시칠리아 왕국]]||'''오스트리아 제국-프랑스 연합군'''[br] [[파일:오스트리아 제국 국기.svg|width=23]][[오스트리아 제국]][br] [[파일:롬바르디아-베네치아 왕국 국기.svg|width=23]] [[롬바르디아-베네치아 왕국]][br][[파일:프랑스 국기(1794-1815, 1830-1958).svg|width=23]] [[프랑스 제2공화국]][br][[파일:양시칠리아 왕국 국기(1816-1848, 1849-1860).png|width=23]] [[양시칠리아 왕국]] || ||<-2> '''{{{#fff 지휘관}}}''' || ||[[파일:이탈리아 왕국 국기.svg|width=23]] [[카를로 알베르토]][br][[파일:이탈리아 왕국 국기.svg|width=23]] [[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|피에몬테 공 비토리오 에마누엘레]][br][[파일:이탈리아 왕국 국기.svg|width=23]] 알폰소 페레로 라 마모라 ||<^|1>[[파일:오스트리아 제국 국기.svg|width=23]] [[요제프 라데츠키]][br][[파일:프랑스 국기(1794-1815, 1830-1958).svg|width=23]][[나폴레옹 3세]] || ||<-2> '''{{{#fff 병력}}}''' || ||피에몬테군 115,000명[br] 자원군 22,000명 ||[[오스트리아 제국군]] 100,000명[br][[프랑스군]] 40,000명 || ||<-2> '''{{{#fff 결과}}}''' || ||<-2> 오스트리아의 승리[br]로마 공화국에 맞선 프랑스의 승리 || ||<-2> '''{{{#fff 영향}}}''' || ||<-2> 오스트리아의 중부 이탈리아 통제권 회복[br]교황령의 로마 재수복 || ||<-2> '''{{{#fff 피해규모}}}''' || ||사망/실종 17,400명 [br]부상 5,000명 ||사망/실종 6,441명 [br]부상 2,944명 || 이러한 상황 속에서 [[프랑스 혁명]]을 통해 전파된 자유주의 사상에 힘입어 [[1800년대]]에 결성된 [[카르보나리당]]이 [[1810년대]]부터 [[빈 체제]]에 항거하며 통일운동을 전개했고 [[1831년]]부터는 [[주세페 마치니]]가 이끄는 [[청년 이탈리아당]]이 [[공화주의]]에 입각한 통일을 주장하며 혁명을 부르짖었다. 전 유럽을 [[혁명]]의 소용돌이에 빠뜨렸던 [[1848년 혁명]] 시기인 1848년 1월, [[시칠리아]]가 [[양시칠리아 왕국]]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. 그리고 이런 반란은 [[밀라노]]와 [[베네치아]], [[피렌체]]로 확대되면서 이탈리아 전역에서 [[빈 체제]]에 항거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. 그러던 중 1848년 11월 [[교황령]]에서는 장관이었던 [[펠레그리노 로시]]가 암살당하고 [[주세페 마치니]]를 대통령으로 세운 [[로마 공화국(1849년)|로마 공화국]]에 위협을 느낀 교황 [[비오 9세]]가 로마를 탈출하여 [[양시칠리아 왕국]]으로 도피하였다. [youtube(0N0H53FRkMk)] 당시 [[사르데냐 왕국|사르데냐-피에몬테 왕국]]의 국왕이었던 [[카를로 알베르토]]는 봉기가 일어난 [[밀라노]]를 샤르데나-피에몬테 왕국에 병합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. 하지만 1849년 3월 23일의 [[노바라 전투]]에서 [[요제프 라데츠키]]가 이끄는 [[오스트리아 제국군]]에게 대패하자 [[카를로 알베르토]] 국왕은 아들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왕태자에게 왕위를 넘기고 물러났다. 결국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[* 1848년 3월 23일 ~ 1849년 8월 22일]은 오스트리아의 군사 개입과 [[나폴레옹 3세]]의 무력 간섭으로 실패했다. 그 결과 오스트리아는 중부 이탈리아 지방의 통제권을 회복했다.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의 실패와 혁명의 실패로 인해 세 가지 통일 방안 중 다음 두 가지가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. * '''[[교황]]을 의장으로 하는 [[연방]] 구성''' [[가톨릭]] [[사제(성직자)|사제]] 출신 [[빈첸초 조베르티]](Vincenzo Gioverti)가 주장하였는데, 그는 [[자유주의]] 교황으로 알려진 [[비오 9세]](Pius IX)에게 희망을 갖고 있었다. 그러나 1848년 11월 로마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[[로마 공화국(1849년)|로마 공화국]]이 세워지자 교황은 [[양시칠리아 왕국]]으로 도피하였고 1849년 6월 [[프랑스군]]이 로마에 입성하고서야 교황은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. 그러나 이후 교황은 20년간 프랑스 주둔군에 의해 그 지위가 유지되었는데 이 상태에서 교황 중심의 연방 국가가 수립되면 통일 이후에도 프랑스의 영향 하에 놓일 것이 명약관화했다. 따라서 이 방안은 무산되었다. 물론 교황이 조베르티의 연방안을 받아들여 의장이 되었다고 해도 오스트리아 등 주변 [[열강]]을 잘 설득해야 된다는 쉽지 않은 문제가 남아있었다. * '''공화국 건설 방안''' [[주세페 마치니]](Giuseppe Mazzini)가 주장했으며 1의 정반대 방안이었다. 그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일시에 폭력 혁명을 일으켜 이를 통해 [[이탈리아 공화국]]을 창설해야 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.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를 둘러싼 국제 정치의 현실과 [[이탈리아인|이탈리아 국민]]의 의식 수준으로 보건대 실현 가능성은 전무하였다. 위의 두 가지 방안이 무산되자 가장 현실성 있는 방안은 북이탈리아의 [[사르데냐 왕국|사르데냐-피에몬테 왕국]]을 중심으로 통일하는 것이었다. 그리고 실제로도 당시 이탈리아의 여러 국가들 중 통일을 주도할 만한 역량이 있었던 국가는 사르데냐-피에몬테 왕국뿐이었다.[* 무엇보다도 롬바르디아-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 제국 직할령으로 합병되어 공화정이 폐기된 이상 정치적인 구심점이 없었고 [[토스카나 대공국]]과 [[모데나 공국]]은 오스트리아 [[합스부르크 가문|합스부르크 왕조]]의 방계가, [[양시칠리아 왕국]]과 [[파르마 공국]]은 [[보르본 왕조|스페인 부르봉 왕조]]의 방계가 통치하는 외국계 국가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. [[사르데냐 왕국|사르데냐-피에몬테 왕국]]의 [[사보이아 가문|사보이아 왕조]]도 뿌리는 [[프랑스인|프랑스계]]였으나 1563년 [[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]] 공작의 토리노 천도를 기점으로 완전히 [[이탈리아/문화|이탈리아화]]하여 19세기에는 이미 [[이탈리아인|이탈리아 정체성]]을 확고히 하고 있었다. 또 사르데냐-피에몬테 왕국은 인구는 좀 부족할지언정 [[피에몬테]]와 [[리구리아]]를 기반으로 한 농업과 상업 등의 경제력이나 [[입헌군주제]], [[토리노 대학교]]를 위시한 정치, 교육적인 면에서는 다른 이탈리아 국가들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